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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계약서를 안 썼다가 작업비 깎인 경험

by 디자이너 소엘 2026. 8. 12.

'근데 비용이 너무 비싼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저렴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 말을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했어요.

왜냐하면 이미 작업을 다 끝낸 뒤였거든요 ^^... (이러지 마세요 제발..)

 

상세페이지를 한두 개 만든 것도 아니고 여러 개를 한꺼번에 작업해서 전부 납품한 상태였어요.

저는 당연히 처음 이야기했던 비용대로 정산받으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작업이 다 끝난 뒤에 갑자기 비용이 비싸다는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 바로 짚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저도 이런 일을 처음 겪어봐서 꽤 당황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큰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계약서를 안 썼거든요.

 

 

 

아는 사람 소개라서 괜찮을 줄 알았어요

당시 저는 회사생활을 거쳐 프리랜서로 여러 일을 받아서 작업하던 시기였어요.

처음부터 생판 모르는 업체를 찾아다니면서 영업한 건 아니었고, 예전에 같이 일했던 분들이 다른 회사로 이직하면서 저를 소개해주거나 주변에 디자인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연결해주는 식으로 일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미 같이 일해본 사람들이 제 작업 스타일이나 결과물을 알고 있으니 저한테도 굉장히 좋은 방식이었어요.

의뢰하는 쪽에서도 누군지도 모르는 디자이너보다는 아는 사람이 소개해준 디자이너니까 조금 더 안심할 수 있었을 테고요.

 

그러다 한 번은 예전에 알고 지내던 부장님 소개로 상세페이지 작업을 맡게 됐어요.

저도 소개받은 일이니까 별 의심을 하지 않았어요.

부장님도 알고 있고, 그쪽에서도 부장님을 알고 있으니 설마 이상하게 끝나겠어?

딱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작업 내용과 비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일을 시작했어요.

계약서는 따로 쓰지 않았고요.

이게 나중에 제일 크게 후회한 부분이 됐어요.

 

 

 

디자인은 결과물만 봐서는 작업량이 잘 안보여요

상세페이지 작업을 해보면 완성된 결과물만 봤을 때는 과정이 잘 보이지 않아요.

사진 넣고, 글씨 쓰고, 예쁘게 정리하면 끝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 전에 들어가는 시간이 꽤 많거든요.

 

제품 자료를 받고 내용을 파악해야 하고, 어떤 내용을 먼저 보여줄지 정해야 하고, 경쟁 제품은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 찾아보기도 해요.

레퍼런스를 찾고 전체적인 콘셉트를 잡은 다음에야 디자인을 시작할 수 있고요.

시안을 만들다가 마음에 안 들면 엎고 다시 만들기도 하고, 필요한 이미지가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고, 문구도 같이 다듬어야 할 때가 있어요.

 

완성된 이미지에서는 이런 시간이 전혀 안 보여요.

저는 이미 그 과정을 다 거쳐서 작업을 끝낸 상태고요.

그런데 납품까지 끝나고 나니 갑자기 비용을 좀 낮춰달라는 이야기가 나온 거죠.

 

쉽게 말하면 음식 다 먹고 나서 '생각보다 비싼 것 같은데 좀 깎아주세요.' 하는 상황처럼 느껴졌어요.

속으로는 정말 황당했어요.

 

 

 

문제는 중간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거였어요

만약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면 오히려 대응하기가 쉬웠을 것 같아요.

처음 협의한 금액이 있고 저는 약속한 작업을 완료했으니 그대로 정산해달라고 이야기하면 됐을 테니까요.

 

그런데 저를 소개해준 부장님이 중간에 있다는 게 계속 신경 쓰였어요.

제가 너무 강하게 나가면 소개해주신 분까지 곤란해질 것 같고, 앞으로 업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다시 만날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소개해주신 분도 상황이 난처해지셨고, 저도 돈 문제 때문에 불편해지고.

참 애매하더라고요.

 

결국 저는 처음 이야기했던 금액을 전부 받지 못했어요.

말하자면 일을 다 하고 나서 강제로 할인을 해드린 셈이었어요 ㅋㅋ...

지금 생각해도 웃을 일은 아닌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부터 나와요.

 

더 속상했던 건 돈 몇 푼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제가 들인 시간과 작업의 가치가 마지막에 갑자기 흥정거리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게 생각보다 되게 자존심 상하고 기분이 많이 상했어요.

 

 

 

그 뒤로는 친한 사람이어도 계약부터 생각하게 됐어요

이 일을 겪고 나서 제일 크게 배운 건 하나였어요.

신뢰와 계약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

 

상대를 의심하기 때문에 계약서를 쓰는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서로 사이좋게 일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거였어요.

처음부터 어디까지 작업하는지, 비용은 얼마인지, 수정은 어디까지 가능한지, 언제까지 작업하는지, 정산은 언제 하는지.

이런 내용을 서로 같은 기준으로 확인해두면 나중에 기억이 달라져서 싸울 일도 훨씬 줄어들어요.

 

특히 디자인은 수정 범위가 정말 정말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

'조금만 수정해주세요.' 라는 말 하나가 글씨 크기 하나 바꾸는 정도일 수도 있지만, 전체 콘셉트를 다시 만드는 수준일 수도 있거든요.

겉으로는 둘 다 ‘수정’인데 디자이너가 들여야 하는 시간은 완전히 달라요.

예를 들어 컬러 하나 바꾸는 수정과, 레이아웃을 다시 짜는 수정은 절대 같은 수정이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그 뒤로 작업을 맡을 때 예전보다 처음 조건을 훨씬 꼼꼼하게 확인하게 됐어요.

 

 

 

프리랜서가 되고 제일 어려웠던 건 내 가격을 정하는 일이었어요

사실 계약서만큼 어려웠던 게 하나 더 있었어요.

내 디자인의 가격을 얼마로 정해야 하는가.

 

회사에 다닐 때는 월급을 받으니까 제가 작업물 하나를 얼마에 만들어야 하는지 직접 계산할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프리랜서가 되면 갑자기 모든 걸 내가 결정해야 해요.

상세페이지 하나 얼마, 로고 하나 얼마, 수정은 몇 번까지, 추가 작업은 얼마.

 

처음에는 저도 정말 어려웠어요.

너무 비싸게 부르면 일을 못 받을 것 같고, 너무 싸게 받으면 하루 종일 일해도 남는 게 없고요.

특히 디자인은 단순히 마우스를 움직인 시간만 계산해서 가격을 정하기도 애매했어요.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시간도 있고, 자료를 찾는 시간도 있고, 방향이 안 잡혀서 화면만 한참 들여다보는 시간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처음 가격을 잡을 때 너무 막막하다면

‘이 작업에 내가 실제로 몇 시간을 쓰게 될까?’ 부터 계산해보는 게 도움이 됐어요.

적어도 내가 하루 종일 매달려야 하는 일을 말도 안 되게 낮은 가격에 받는 일은 조금 줄일 수 있었거든요.

 

 

 

저렴한 가격이 항상 일을 더 쉽게 만들어주지도 않았어요

초반에는 일감을 놓칠까 봐 가격을 낮추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데 오래 해보니 무조건 싸게 받는다고 해서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처음부터 작업 범위와 비용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왜 이 정도 비용이 필요한지 설명할 수 있는 게 훨씬 중요했어요.

 

결국 제가 만드는 결과물에 대해서는 제가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했어요.

왜 이렇게 디자인했는지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왜 이 작업에 이 정도의 시간과 비용이 필요한지도요.

회사에 있을 때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프리랜서가 되니까 이런 것도 전부 업무가 되더라고요.

디자인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견적도 내야 하고, 일정도 관리해야 하고, 클라이언트와 이야기하고, 정산까지 챙겨야 했어요.

혼자 작은 회사를 하나 운영하는 기분이었어요.

 

 

 

계약서는 돈보다 관계를 지켜주는 장치였어요

처음 그 일을 맡았을 때는 계약서를 쓰자는 말을 꺼내는 게 괜히 멋쩍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아는 사람 소개인데 굳이? 좋게 시작하는 일인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랬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계약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마지막이 더 불편해졌어요.

처음부터 서로 약속한 내용을 글로 남겨뒀다면 비용 이야기가 뒤늦게 나올 이유도 훨씬 적었을 거고, 문제가 생겨도 기준점이 있었겠죠.

그 뒤로 저는 ‘좋은 관계니까 계약서를 안 쓴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됐어요.

오히려 좋은 관계로 끝내고 싶으니까 처음부터 정확하게 정리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경험 자체는 당연히 좋은 기억은 아니에요.

그래도 그 일을 한 번 겪은 뒤로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자세가 꽤 많이 달라졌어요.

그리고 지금 과거의 저한테 딱 한마디 해줄 수 있다면 아마 이 말을 할 것 같아요.

부장님 소개고 뭐고 일단 계약서부터 써...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