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일을 오래 하다 보니까 작업시간을 잡아먹는 게 꼭 디자인 자체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다 만들어놓고 다시 고치는 시간이 길었던 적이 훨씬 많았어요.
처음에는 저도 그냥 '디자인은 원래 수정이 많은 일이니까.' 하고 받아들였어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방향이 나올 때까지 바꾸고,
담당자가 추가 의견 주면 또 바꾸고,
팀장님 의견이 뒤늦게 들어오면 다시 바꾸고.
그러다 보면 처음 예상했던 작업시간을 훌쩍 넘기는 경우가 꽤 있었어요.
특히 프리랜서로 일할 때는 더 크게 느껴졌어요.
하루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작업이 수정 때문에 이틀, 사흘로 늘어나면
그만큼 다음 작업 일정까지 같이 밀리거든요.
회사에서도 비슷했어요.
분명 어제 끝낸 파일인데 오늘 다시 열고 있고, 내일 또 열고 있는 일이 생겨요.
나 도대체 이거 언제까지 해야되는 거지?? 싶은 순간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런 일을 반복해서 겪다 보니 제가 디자인을 느리게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수정이 생기는 과정 자체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뒤부터는 작업 방식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어요.
디자인하기 전에 확인하는 내용을 늘리고,
프리랜서 작업에서는 수정 범위를 미리 정하고,
완성본을 만들기 전에 중간에 한 번씩 방향을 확인하는 식으로요.
수정이 아예 없어지지는 않았어요.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예전처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큰 수정, 서로 다른 담당자 의견 때문에 반복되는 수정, 처음에 확인했으면 안 생겼을 수정은 확실히 줄어들었어요.
제가 실제로 수정에 치여본 뒤 바꾸게 된 작업 방식 세 가지를 정리해볼게요.
1. 기획을 먼저 확인했더니 뒤집어엎는 수정이 줄었어요
예전에는 자료를 받으면 디자인부터 빨리 시작하는 편이었어요.
일단 만들어놓으면 뭔가 진행되는 느낌도 들고 (사실 이걸 열어놔야 일한다고 생각하는 상급자가 많기도 했어요.. 처세술임ㅎ...),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빨리 나오니까요.
특히 상세페이지처럼 분량이 긴 작업도 자료를 쭉 훑어본 다음 바로 포토샵을 열어서 메인 비주얼부터 잡곤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일하다 보니 뒤쪽에서 큰 수정이 나오는 경우가 너무 많이 생겼어요.
예를 들어 상세페이지를 어느 정도 만들어놨는데
갑자기 담당자가 '아, 그런데 이 제품은 사실 이 기능이 제일 중요해요.' 이러는 거예요....
만약 이런 경우 그 기능이 페이지 중간쯤에 조그맣게 들어가 있었다면 단순히 그 부분만 키워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메인 카피부터 바꿔야 하고, 위쪽 정보 순서도 다시 잡아야 하고, 이미지도 그 기능에 맞는 것으로 바꿔야 하고, 뒤에 있는 내용까지 줄줄이 위치가 달라질 수 있어요.
또 어떤 경우에는 제가 생각했던 타깃과 실제 판매 타깃이 달랐던 적도 있었어요.
저는 젊은 소비자를 생각하고 이미지를 잡았는데 실제 구매층은 연령대가 훨씬 높았다든가,
제가 디자인적으로 중요하다고 본 기능보다 세일즈팀에서는 전혀 다른 기능을 판매 포인트로 밀고 있었다든가요.
그때 느꼈어요.
이걸 디자인 다 하고 알면 늦는구나! 내가 내 밥그릇 챙겨야 몸이 덜 피곤하겠구나!
그래서 나중에는 작업 전에 묻는 게 많아졌어요.
이 제품에서 제일 중요한 장점이 뭔지,
실제로 누가 많이 사는지,
경쟁 제품 대신 이 제품을 선택하는 이유가 뭔지,
꼭 위쪽에 들어가야 하는 정보가 있는지,
반대로 중요해 보이지만 실제 판매에서는 크게 반응이 없는 기능은 뭔지.
제품 자료만으로 잘 모르겠으면
세일즈팀이나 마케팅팀에도 직접 물어봤어요.
'이 제품 설명할 때 어떤 기능을 제일 많이 얘기하세요?'
'고객들이 제일 많이 물어보는 게 뭐예요?'
'제일 센 경쟁사는 어디고, 우리 제품은 뭐가 더 좋아요?' 이런 식으로요.
가끔은 정말 제품 소개서 여러 장 읽는 것보다 세일즈 담당자랑 잠깐 이야기한 게 더 도움이 될 때가 있었어요.
판매 현장에서 직접 듣는 고객 반응은 제품 자료에 안 적혀 있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레퍼런스도 예전보다 초반에 더 많이 확인하게 됐어요.
제가 생각하는 '깔끔한 디자인'과 클라이언트가 생각하는 '깔끔한 디자인'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걸 몇 번 겪어봤거든요.
제가 생각한 깔끔함은 여백이 많고 색상을 절제한 디자인인데 클라이언트는 요소는 많이 들어가 있지만 정렬이 반듯한 디자인을 깔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고급스럽게 해주세요.' 이 멘트도 위험 감지 레이더 켜지는 멘트 중 하나예요.
누군가는 블랙 계열의 미니멀한 고급스러움을 생각하고, 누군가는 금색에 반짝반짝한 느낌을 떠올릴 수 있더라고요.
어떻게 알았냐고요? 저도 알고싶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일을 겪고 어느 순간부터는 클라이언트에게 좋아하는 레퍼런스를 직접 보여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제가 몇 가지 방향을 찾아서 '이 중에서는 어느 쪽에 가까우세요?' 하고 먼저 확인하는 편으로 바뀌었어요.
이렇게 초반에 시간을 조금 더 쓰니까 예전보다 시작은 느려 보일 수 있지만 끝나는 시간은 오히려 빨라졌어요.
디자인을 다 만든 다음 '전체 분위기를 다시 바꿔주세요.' 라는 말을 듣는 일이 줄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수정하면서 제일 싫었던 건 폰트 하나 바꾸는 것도, 색상 하나 수정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방향을 다시 잡아주세요.' 이 말이었습니다.
그건 수정이 아니라 새 작업 수준이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디자인을 빨리 시작하는 것보다 처음에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게 전체 작업시간을 더 많이 줄여준다고 생각해요.
2. 수정 기준을 정해두니까 프리랜서 작업이 훨씬 편해졌어요
프리랜서 초반에는 수정에 대한 기준도 지금보다 훨씬 느슨했어요.
클라이언트가 수정해달라고 하면 그냥 해드리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한 번, 두 번, 세 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처음 계약한 작업이 어디까지였는지 저도 애매해질 때가 있었어요.
특히 제가 크게 데였던 경험이 하나 있어요.
예전에 아는 분을 통해 상세페이지를 여러 건 작업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었어요.
소개받은 일이고 서로 연결된 사람이 있으니까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별도의 계약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았어요.
결과적으로 작업을 다 하고 나서 처음 이야기했던 것보다 작업비를 줄이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이미 결과물은 전달한 상태였고, 계약서도 없고, 작업 범위가 어디까지였는지도 문서로 남겨놓지 않아서 굉장히 애매해졌어요.
저도 이렇게 데여보고 난 후에야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아는 사람이든, 소개받은 사람이든, 처음 거래하는 사람이든 돈과 작업 범위는 처음부터 명확하게 적어두는 편이 훨씬 편하더라고요.
수정도 그중 하나였어요.
처음에는 그냥 '수정 가능합니다.' 정도로 생각했다면, 나중에는 수정 횟수와 범위를 따로 보기 시작했어요.
저는 기본 수정 2회 정도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기준을 잡았고, 그 이상이거나 처음 이야기하지 않았던 내용이 추가되면 작업량에 따라 별도 비용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바꿨어요.
왜냐하면 실제로 해보니까 '수정 한 번'이라는 말도 굉장히 애매했거든요.
카피 한 줄 바꾸고, 이미지 위치 조금 옮기고, 색상 조정하는 건 수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전체적인 분위기를 다른 스타일로 바꾸거나, 처음 없던 섹션을 여러 개 추가하거나, 제품 내용 자체가 달라져서 페이지 구성을 다시 해야 한다면 처음 작업량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예전에는 이런 것도 '수정해달라고 하셨으니까 해야지.' 하고 그냥 했어요.
그러다 보니 실제로 투입되는 시간에 비해 처음 받은 작업비가 너무 적어지는 프로젝트도 생기더라고요.
이런게 쌓이면서 제가 심적으로 괴로웠는데 수정 횟수를 정해두고 나서는 저도 판단하기가 훨씬 편해졌어요.
여기까지는 기본 수정, 여기부터는 추가 작업. 그런 기준이 생긴 거예요.
그리고 여러 명이 검토하는 프로젝트에서는 수정 의견을 가능하면 취합해서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어요.
이것도 몇 번 당해보고 만든 방법입니다 ㅠㅠㅠㅠㅠㅠ 완전 꿀팁이니까 빨리 어디다 메모해 두세요.
담당자 A가 수정 요청을 줘서 반영했는데
다음날 담당자 B가 '저는 원래 게 더 좋은 것 같은데요.' 해서
다시 바꿨더니 대표님이 보시고 또 다른 의견을 주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디자인 파일이 과거와 현재를 계속 오갑니다.
어제 지운 걸 오늘 다시 살리고, 오늘 바꾼 걸 내일 원래대로 돌리고. 내 정신은 피폐해집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내부에서 의견을 한 번 정리해서 전달해달라고 요청했어요.
담당자와 친분이 좀 있는 편이라면 결정권자의 컨펌 받아와 달라고 능청스럽게 부탁하기도 했어요.
이것만 해도 같은 부분을 여러 번 손대는 일이 꽤 줄어들어요.
물론 오래 거래한 클라이언트에게는 간단한 수정이나 작은 작업을 서비스로 해드릴 때도 있었어요.
(모든 걸 칼같이 '이거 추가금입니다.'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지금도 그런 것 같아요 ㅋㅋ)
다만 예전과 달라진 건 서비스를 해주는 것과 원래부터 무제한으로 해줘야 하는 걸 구분하게 됐다는 점이에요.
기준이 있으니까 제가 선택할 수 있게 된 거죠.
결국 수정 제한은 클라이언트를 막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제가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기 위한 기준에 가까웠어요.
프리랜서로 오래 일하려면 디자인 실력만큼 내 작업시간을 어디까지 사용할지 정하는 것도 필요하더라고요.
3. 완성 전에 보여주기 시작하니까 큰 수정이 훨씬 줄었어요
예전에는 제가 어느 정도 완성해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디자이너인데 러프한 걸 보여주면 괜히 덜 만든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가능하면 메인부터 본문까지 어느 정도 완성도를 끌어올린 다음 클라이언트에게 보여주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이 방식의 가장 큰 문제가 있었어요.
클라이언트가 방향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제가 완성도를 올리려고 쓴 시간이 통째로 수정 시간이 돼버리는 거예요!!
한 번은 디자인을 꽤 많이 진행한 뒤 보여드렸는데 전체적인 느낌을 조금 바꾸고 싶다는 피드백이 들어왔어요.
세부 수정이면 괜찮은데 톤 자체를 바꾸려면 배경, 폰트, 그래픽, 이미지, 레이아웃까지 같이 영향을 받아요.
그때부터 '이럴거면 왜 다 완성해서 보여주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는 큰 작업일수록 중간에 한 번 방향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바꿨어요.
상세페이지라면 30개 섹션을 전부 완성하기 전에
메인 비주얼, 대표 기능 섹션 한두 개,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할 기본 레이아웃 정도를 먼저 보여주는 거예요.
이 단계에서 확인하는 건 완성도가 아니었어요.
제품을 크게 보여주는 방향이 맞는지, 전체 색감이 원하는 느낌인지, 폰트 분위기가 괜찮은지, 정보 순서는 맞는지, 이미지 톤은 맞는지 등의 큰 방향이었어요.
이렇게 바꾸니까 일이 훨씬 편해졌어요.
초반 시안에서 '조금 더 밝은 느낌이 좋겠어요.' 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상세페이지를 끝까지 다 만든 뒤 '전체적으로 조금 더 밝았으면 좋겠어요.' 라는 이야기를 듣는 건 전혀 다른 일이거든요 ㅋㅋㅋㅋㅋ
앞에서는 몇 개만 고치면 되지만 뒤에서는 전체를 다 고쳐야 해요.
특히 폰트나 반복 레이아웃처럼 페이지 전체에서 계속 사용하는 요소는 초반에 확인받는 게 정말 중요했어요.
(제가 늘 강조하는 내용이지만 디자인은 폰트가 5할 이상으로 정말 중요하거든요.)
메인과 대표 섹션에서 방향을 먼저 맞춰놓고 '이 톤으로 나머지도 진행하겠습니다.' 협의하고 넘어가면 저도 훨씬 마음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어요.
중간점검을 하면서 또 하나 바뀐 게 누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지도 미리 묻게 된 거예요.
가능하면 프로젝트 초반에 최종 결정권자가 누구인지, 중간 시안을 같이 봐야 하는 사람이 있는지 한 번 확인하는 편이 됐어요.
회사 안에서 작업할 때도 똑같았어요.
규모가 큰 프로젝트는 혼자 끝까지 들고 가기보다 어느 정도 뼈대가 잡힌 시점에서 관련 부서와 확인하면 뒤늦게 큰 의견이 들어오는 걸 줄일 수 있었어요.
저는 지금도 수정이 없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화면을 실제로 보고 나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고, 클라이언트나 다른 부서 의견을 듣고 결과가 더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싫었던 건 충분히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수정이에요.
처음에 물어봤으면 알 수 있었던 내용을 뒤늦게 알고, 최종 결정권자가 뒤늦게 등장하고, 작업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계속 새로운 일이 붙는 것. 이런 수정들이요.
예전에는 작업시간을 줄이려면 포토샵 단축키를 더 외우고, 손을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래 해보니까 제가 가장 시간을 많이 아낀 건 손이 빨라졌을 때가 아니라 다시 만드는 일이 줄었을 때였어요.
그래서 지금은 작업이 예상보다 계속 길어진다면 '내가 왜 이렇게 느리지?' 부터 생각하지 않아요.
어디에서 수정이 반복됐는지 먼저 봐요.
처음 기획에서 빠진 게 있었는지, 수정 범위가 애매했는지, 중간 컨펌 없이 너무 멀리 가버렸는지.
이 세 군데를 바꾸고 나서는 예전보다 작업시간을 예상하기도 쉬워졌고 이미 끝낸 파일을 며칠씩 다시 열어보는 일도 확실히 줄었어요.
여러분도 무한 수정 도르마무의 굴레에 빠지지 않으려면 꼭 제 글을 참고하셔서 기준을 세워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