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보면 디자인팀 사람하고만 일할 수는 없어요.
저도 세일즈팀, 마케팅팀, 운영 담당자랑 진짜 많이 협업했거든요.
일하면서 답답한 순간이 되게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디자이너가 아닌 이상 협업자도 그냥 일반인 클라이언트다.
디자인 용어를 정확히 모를 수도 있고, 본인이 뭘 원하는지 처음부터 정리해서 말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문제는 그걸 제가 다 작업한 다음에 말해주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알아서 예쁘게 해주세요~ 해서 제가 나름대로 기준 세우고 기획해서 시안을 줘요.
그러면 그제야
"아, 이거 말고 이 내용이 더 중요해요. 이걸 위로 올려주세요."
"이 내용은 사실 장점이 아니라서 빼주세요."
"밴더사에서 이 내용은 꼭 넣어달라고 했어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결말이에요. 진작 말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실무를 오래 해보니까 이런 내용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정리해서 주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더라고요.
컨펌하시는 분이 상급자라면 뭐... 더 할 말도 없습니다.
근데 같이 일하는 실무 협업자가 이렇게 뒤늦게 핵심내용을 하나씩 꺼내면 좀 억울해요.
그분들이 제 직장상사도 아닌데 제가 계속 물어보고 다시 만들고 또 물어보고...
제가 물어보는 것도 한두 번이죠!
그래서 나중에는 아예 작업 시작 전에 꼭 받아두는 자료를 정해놨어요.
기획서, 제품 이미지, 라이프스타일 이미지, 꼭 들어가야 하는 내용, 넣으면 안 되는 내용.
이것들만 초반에 정리돼도 불필요한 수정이 진짜 많이 줄었어요.
1. 기획서부터 받아두기
저는 요청 메일이 오면 일단 기획서를 먼저 달라고 했어요.
여기서 제가 말하는 기획서는 엄청 거창한 문서가 아니에요.
대략적인 상세페이지나 랜딩페이지 구성이 정리돼 있고,
어떤 내용을 먼저 보여줘야 하는지,
무슨 제품을 밀어야 하는지,
어떤 혜택이 핵심인지
이 정도만 보여도 충분했어요.
이게 없으면 결국 제가 임의로 판단하게 됩니다.
담당자는 알아서 해달라고 하지만, 제가 진짜 알아서 해주면 높은 확률로 수정이 들어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보기에는 제품의 빠른 충전 기능이 제일 좋아 보여서 그걸 앞쪽에 크게 잡았다고 해볼게요.
시안 보여드리면
'아, 이거보다 휴대성이 더 중요해요!' 할 수 있어요. 그럼 다시 바꿔야죠.
또 제가 제품 A가 메인인 줄 알고 크게 넣었는데
'이번에는 B를 더 많이 팔아야 해요.' 하면요? 또 다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작업 시작 전에 아예 필요한 걸 먼저 요청하기 시작한 거예요.
핵심 내용이 들어간 기획서.
제품 전체 이미지.
제품을 실제로 사용하는 라이프스타일 이미지.
회사에서 제공할 수 있는 제품 관련 이미지 전부.
그리고 꼭 들어가야 하는 내용.
반대로 절대 넣으면 안 되는 내용. 딱 이정도만요.
특히 제품 이미지랑 라이프스타일 이미지는 가능한 한 많이 달라고 했어요.
디자인하다 보면 처음에는 안 쓸 것 같은 이미지도 갑자기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
제품 정면컷만 받아놨는데 중간에 사용 장면이 필요해질 수도 있고.
제품 디테일을 보여줘야 해서 측면 이미지가 필요할 수도 있고요.
그때마다 다시 요청하면 작업 흐름이 끊겨요.
몇번 겪어보니 처음부터 "가지고 계신 이미지 있으면 다 주세요." 하고 받는 편이 편하더라고요.
그리고 꼭 들어가야 하는 것만큼 넣으면 안 되는 것도 중요했어요.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장점처럼 보여서 넣었는데 실제로는 마케팅상 강조하면 안 되는 내용일 수도 있고,
밴더사나 브랜드 본사에서 사용하지 말라고 한 표현이 있을 수도 있고요.
이걸 다 만든 다음 알면 진짜 허무합니다...
음... 사실 그래서 저는 초반에 좀 세게 말했어요.
'이 자료 다 받아야 작업 시작할 수 있어요. 지금 업무가 여러 개 같이 걸려있어서 빨리 보내주셔야 일정에 맞춰드릴 수 있으니 참고 부탁드려요.'
말은 이렇게 하더라도 자료가 다 안 와도 작업은 시작할 수 있어요.
중간에 자료 추가로 받아도 됩니다.
근데 그렇게 하면 수정이 진짜 많이 늘어나더라고요.
이미 잡아둔 레이아웃에 수정이 계속 붙으면 한 번 할 걸 두세 번 하게 돼서요.
결국 자료를 늦게 받는 것보다 초반에 담당자를 조금 귀찮게 하는 게 훨씬 싸게 먹혔어요.
2. 피드백은 말 그대로 받지 않기
협업하면서 제일 난감했던 건 애매한 피드백이었어요.
- 조금 더 예쁘게 해주세요.
- 좀 더 고급스럽게요.
- 임팩트가 부족해요.
- 뭔가 심심해요.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 입장에서는 느낌은 알겠는데 그걸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저도 그건 이해해요.
그래서 이런 말을 들으면 그대로 수정하지 않았어요.
한 번 더 물어봤어요.
"제품이 더 크게 보여야 하는 걸까요?"
"혜택이 약하게 보여서 그런가요?"
"색감을 좀 더 강하게 원하세요?"
"혹시 생각하시는 레퍼런스 있어요?"
이렇게 구체적으로 바꿔서 다시 질문하면 훨씬 답이 잘 나왔어요.
특히 '고급스럽게'는 정말 위험한 단어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고급스러움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고급스러움이 완전히 다를 수 있거든요.
저는 여백 넓고 정돈된 화면을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금색 많이 들어간 화려한 이미지를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서로 그걸 확인 안 하고 작업하면 수정 확정입니다.
그리고 협업자가 여러 명이면 더 조심했어요.
세일즈팀은 제품을 더 키워달라고 하고.
마케팅팀은 카피를 더 크게 해달라고 하고.
운영 담당자는 행사기간이 더 잘 보여야 한다고 하고.
그래서 가능하면 한 명이 의견을 정리해서 주도록 요청했어요.
A 의견 반영했다가 B 의견 때문에 다시 빼고, C 의견 때문에 원래대로 돌리는 일을 몇 번 겪으면요.
저는 마음이 피폐해지더라고요...ㅠ
피드백은 많이 받는다고 좋은 게 아니었어요.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받고, 서로 충돌하는 의견은 정리해서 받는 게 훨씬 중요했어요.
3. 기록은 나중을 위해 남겨두기
협업하면서 제가 점점 중요하게 본 건 기록이었어요.
처음에는 옆자리에서 '이거 제품 A 말고 B로 바꿔주세요.' 하면 네~ 하고 바로 바꿔드렸어요.
메신저로 오면 더 편하죠. 그냥 반영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수정이 여러 번 쌓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거 왜 B로 바뀌었어요? 원래 A 아니었나요?'
분명 바꿔달라고 했는데 언제였는지 누구였는지 기억 못하죠.
그 내용 찾으려면 또 단톡방 등산해야 돼요.
그래서 중요한 변경사항은 가능하면 기록으로 남겨뒀어요.
특히 일정!! 숫자 관련!!
제품 변경, 할인율, 메인 카피, 행사조건.
이런 건 나중에 말이 달라지면 작업 전체가 다시 바뀔 수 있으니까요.
구두로 얘기했다면 메신저에 간단하게라도 남겼어요.
'아까 말씀주신 내용대로 제품 B로 변경해서 진행할게요.' 이 정도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 부서가 같이 엮여 있는 작업은 최종 컨펌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알아두는 게 좋았어요.
실무 담당자가 괜찮다고 해서 진행했는데 팀장님이나 부장님이 보시고
'이거 왜 이렇게 했어요?' 하면 또 바뀔 수 있거든요.
그래서 큰 방향이나 중요한 정보가 바뀌는 경우에는 '이 방향으로 최종 진행하면 될까요?' 한 번 꼭 확인받고 넘어갔어요.
급건이나 일정 변경처럼 다른 사람 업무까지 영향을 주는 내용은 더 조심했고요.
사수나 팀장님께 먼저 상황 공유하고, 필요한 경우 관련 사람들 CC 걸어서 메일로 남겨두면 나중에 훨씬 깔끔합니다.
저는 거창한 회의록엔 소질이 없어서 적당히 알아볼만한 기록만 남겼어요.
다만 나중에 '누가 이렇게 하자고 했지?' 라는 말이 나올 것 같은 내용만 남겨두면 돼요.
몇 번 데여보면 그럴 것 같은 촉이 옵니다. 신기하게도 나쁜 느낌은 대부분 틀리지 않더라고요;;
아무튼 짧게 써둔 그 몇 줄 덕분에 같은 작업 두 번 하는 일이 진짜 많이 줄어들 수 있으니 저를 믿고 한번 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