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꿈꾸던 영상 디자이너를 포기한 이유

by 디자이너 소엘 2026. 8. 14.

그 당시 저는 친구와 같이 자취를 하고 있었어요.

같은 집에 사는데도 얼굴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제가 야근때문에 집에 잘 못 들어갔거든요.

친구랑 사이가 안 좋았던 게 아니라 회사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야근은 기본이고 철야가 이어지면 회사 기숙사에서 몇 시간 쪽잠을 자고 다시 일했어요.

며칠 동안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있었고요.

 

스무 살 초반의 저는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제가 좋아하던 영상 일을 진로에서 내려놓게 된 건 그때부터였어요.

 

 

 

꿈꾸던 현장에 들어갔는데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치열했어요

대학교에서는 영상과 그래픽 디자인을 함께 배웠어요.

2D, 3D 모션그래픽부터 영상 편집, VFX까지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영상 쪽 일을 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고요.

그래서 졸업 전 TV CF 포스트프로덕션 회사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을 때 정말 좋았어요.

학교에서 배우던 것들이 실제 광고 제작 현장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 직접 볼 수 있었으니까요.

 

일 자체는 재미있었어요.

특히 컬러그레이딩 작업을 좋아해서 컬러룸 안에 있는 장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을 정도예요.

 

문제는 일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었어요.

광고는 방송 일정이 정해져 있으니까 마감을 미룰 수가 없었어요.

수정이 생기면 뒤의 작업까지 연달아 영향을 받았고, 클라이언트가 광고를 확인하러 오는 시사가 있는 날이면 숨도 못쉬게 일해야 했어요.

그렇게 야근과 철야가 반복되면서 퇴근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해질 때도 있었어요.

 

 

 

친구랑 같이 살면서도 얼굴을 못 봤어요

당시 친구와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제가 며칠씩 집에 못 들어가니까

친구가 저한테 '우리 같이 사는 거 맞아? ㅠㅠ' 하면서 속상해 하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도 과제 때문에 밤을 새워본 적은 많았어요.

그런데 학생 때 밤을 새우는 것과 회사에서 철야하는 건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학교 과제는 어쨌든 제 작업 하나를 끝내면 됐지만, 회사에서는 여러 사람의 작업이 연결돼 있고 마지막에는 실제 방송 날짜까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가 힘들다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이게 완전히 불가능했어요.

처음에는 이게 업계니까 당연한 건가 보다 생각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이 정도는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몸이 먼저 그만하라고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어요

그런 생활이 반복되니까 몸이 점점 안 좋아졌어요.

장염도 생기고, 방광염도 생기고, 위도 계속 아팠어요.

당시 저는 스무 살을 조금 넘긴 나이였어요.

그 나이에 벌써 몸이 이렇게 망가지는 걸 보면서 좀 겁이 났어요.

지금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게 직업이 되면?

1년, 5년, 10년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 질문을 해보니까 답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영상을 만드는 게 싫어진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생활방식까지 계속 감당할 수 있을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어요.

그때 처음으로 좋아하는 일과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꼭 같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았죠.

 

 

 

인턴을 마치고 포스트프로덕션을 떠났어요

결국 인턴 기간을 마친 뒤에는 포스트프로덕션 쪽으로 계속 취업하지 않기로 했어요.

당시 저에게는 꽤 큰 진로 변경이었어요.

대학교에서 영상 작업을 많이 했고 포트폴리오도 영상 중심으로 준비되어 있었거든요.

졸업은 다가오는데 정작 그 포트폴리오를 들고 영상회사에 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여기서 갑자기 문제가 생겼죠.

그럼 나는 이제 뭘 하지?...;;;

몇 년 동안 한쪽 방향을 보고 가다가 졸업 직전에 길을 틀게 된 셈이니까요.

 

그때 다시 제가 오래 해왔던 걸 생각해봤어요.

결국 포토샵이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만져왔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속 사용했고, 영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제 옆에 있던 친구같은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래서 그래픽과 웹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어요.

 

 

 

영상 포트폴리오를 들고 웹디자이너가 될 수는 없었어요

방향을 결정했다고 바로 취업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제가 준비해둔 포트폴리오는 영상 작업 비중이 컸으니까요.

웹디자이너로 지원하려면 보여줄 작업부터 다시 정리해야 했어요.

기존에 했던 그래픽 작업을 추리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취업할 수 있는 형태로 포트폴리오를 다시 만들었어요.

 

그 과정을 거치면서 진로 변경이 진짜라는 게 실감났어요.

이제 영상회사에는 가지 말아야지 막연히 생각할 때와, 실제로 기존 포트폴리오를 내려놓고 다른 방향의 작업물을 만드는 건 느낌이 완전히 달랐거든요.

그래도 그래픽 디자인 자체는 워낙 오래 좋아했던 분야라 시작하고 나니 생각보다 낯설지는 않았어요.

결국 저는 첫 정식 직업을 웹디자이너로 시작했고, 이후에는 상세페이지와 디지털 콘텐츠를 중심으로 10년 넘게 일하게 됐어요.

 

 


그런데 영상과 완전히 헤어지지는 못했어요

재미있는 건 포스트프로덕션을 떠났다고 해서 제가 영상 작업을 그만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제가 현업 디자이너로 일하는 동안 콘텐츠 환경이 계속 바뀌었어요.

유튜브가 커지고,

인스타그램에는 영상 콘텐츠가 많아지고,

나중에는 릴스, 유튜브 쇼츠, 네이버 클립처럼 짧은 영상 콘텐츠까지 계속 생겼어요.

 

회사에서도 자연스럽게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일이 많아졌어요.

SNS용 영상도 필요하고,

제품 소개 영상도 필요하고,

행사 영상을 편집하기도 하고,

짧은 광고 콘텐츠를 만들어야 할 때도 있었어요.

그때 저는 오히려 대학에서 영상을 제대로 배워둔 덕을 많이 봤어요.

 

 

 

영상까지 할 줄 아는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게 장점이 됐어요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2010년대 초반에는 제 주변에 그래픽 디자인과 영상 작업을 둘 다 실무 수준으로 다루는 디자이너가 지금처럼 흔하게 보이지는 않았어요.

저는 학교에서 영상 제작을 꽤 깊게 배웠고, 포스트프로덕션에서 실제 제작 과정도 경험해봤어요.

거기에 현업에서 계속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속도까지 빨라졌고요.

 

그래서 그래픽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이거 영상으로도 하나 만들 수 있어요?" 하고 요청이 와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대응할 수 있었어요.

제가 만든 그래픽 소스를 그대로 활용해서 영상 콘텐츠로 확장하기도 쉬웠고요.

결국 영상 경험은 사라진 게 아니라 저라는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더 늘려준 셈이었어요.

처음에는 영상 쪽 진로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그 경험이 제 경쟁력 중 하나가 됐어요.

실제로 저의 멀티 디자인 능력을 인정받아 연봉 협상도 성공했었답니다!! (뿌듯)

 

 

 

심지어 유튜브 채널도 운영해봤어요

여담이지만 저도 나중에는 직접 유튜브 채널을 운영해본 적이 있어요 ㅋㅋㅋㅋ

회사 걸 키우는데 제 걸 안 하기가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결국 어떻게든 영상이랑 계속 엮이게 된거죠.

 

회사에서도 영상을 만들고,

개인적으로도 영상을 만들고,

새로운 플랫폼이 생기면 또 거기에 맞는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영상 디자이너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도 생각보다 크지 않았어요.

영상 제작 회사에서 일하지 않았을 뿐이지 저는 계속 영상을 만들고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한 가지 분야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래픽과 영상을 같이 다룰 수 있다는 게 뿌듯했어요.

 

 

 

꿈을 포기했다기보다 직업의 중심을 바꾼 거였어요

스무 살 초반에는 포스트프로덕션을 떠나는 걸 꽤 크게 생각했어요.

그동안 준비해온 길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제가 영상을 버린 건 아니었어요.

직업의 중심을 영상에서 그래픽 디자인으로 옮겼을 뿐이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방향을 바꾸고 나니 영상은 필요할 때마다 다시 제 일 속으로 들어왔어요.

대학교에서 배운 영상 기술도,

포스트프로덕션에서 봤던 제작 과정도,

그때 익혔던 빠른 작업 감각도 다른 형태로 계속 남아 있었어요.

 

당시에는 몇 년 동안 배운 걸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하나도 버려지지 않았더라고요.

오히려 그래픽 디자이너로 오래 일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넓혀줬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때의 선택을 영상 디자이너의 꿈을 포기했다고만 생각하지 않아요.

몸이 버티기 어려운 방식의 일을 그만두고, 제가 더 오래 할 수 있는 쪽으로 직업의 중심을 옮긴 거였어요.

 

그리고 영상은요.

그렇게까지 헤어지려고 했는데 결국 지금까지 계속 따라오네요ㅋㅋㅋㅋ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원래 가려고 했던 길이 있었는데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된 적 있나요?

아니면 나는 이 일 절대 안 해!! 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그게 직업이 되어 있다든지요.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것 같아요 :D